Ⅰ
회화, 입체는 물론 비디오와 애니메이션 등 다양한 매체와 형식실험을 지속해 온 작가 조기주의 작품을 관통하는 형식적 요소가 있다면 원(圓)이다. 30여 회의 개인전을 가진 그녀는 매체에 대한 다양한 실험은 물론, 인문학과 자연과학 그리고 다양한 미술 담론을 탐구하며 왕성한 활동을 보여왔다. 작가 활동을 시작하던 1980년대 초부터 그녀의 조형 공간에 구사되기 시작한 원은 때로는 작게 축소되어 점이 되기도 하고 크기가 다른 원들을 구성하여 화면의 역동성을 구축하면서 다양한 관심사를 담아내는 매개적 존재가 되어왔다.

(그림 0) <Untitled>, 1981
1981년 《제1회 개인전》에서 보여준 초기의 원은 자신의 여성성으로부터 자연스럽게 비롯된 것이었다. 물론 작가는 원을 견고한 기성의 틀로 전제하고, 원을 둘러싼 작은 점들을 기존의 틀에 도전하고자 하는 자신의 에너지로 설정하고 있지만, 그것은 다소 직설적인 생물학적 유기체의 형상으로서 헤엄치는 정자들을 받아들이는 난자의 핵과 같은 형태를 가진 것이었다. 또한 여성성에 대한 인식은 본인의 신체 주기의 리듬을 추상적으로 표현한 작품 <Up and Down> (그림 1)을 통해서도 구체화 되고 있다. 초기의 원들은 기하학적 형태 대신 자연스러운 유기적 형태로 끊임없이 움직이며 생동하는 존재로 형상화되는데 자궁, 잉태, 출산, 생명 등의 관념과 결부된 것이었다. 때론 세상을 바라보는 절대자의 눈동자처럼 중심으로부터 빛을 발하는 형태로 표현되기도 하고 빠른 속도감을 보이며 유동성을 가진 무한한 우주의 스펙터클을 구성하는 요소가 되기도 한다. 화면에 표상된 그녀의 원은 점차 정형의 기하학적 형태로 변모하게 되며, 후기에 오면 원형의 콘크리트 패널로 다양한 이미지와 오브제를 융합하고 담아내는 물질적 기반으로까지 확장된다. 현대 문명을 상징하는 콘크리트라는 매체를 원형 또는 정방형의 구조로 제작한 뒤 그 위에 또 다른 원의 형상이나 금속판, 오브제를 부착하거나 모종의 드로잉을 흔적으로 남긴다. 의도와 우연의 절묘한 경계를 넘나들며 이 흔적들은 무기질의 콘크리트에 새로운 생명을 잉태케 하며 다양한 사물과 이미지를 포용하는 유기적 구조물로 거듭나는 것이다. 이러한 원형 시멘트 구조물들은 때론 전시장의 화이트 큐브의 벽면에, 때론 콘크리트 벽면에 설치되어 가변적이며 순환성을 가진 세계와 우주의 영원성을 희구하는 언어로 사용된다.

(그림 1) <Un and Down>, 1981
Ⅱ.
초반의 작품들에서 그녀의 원은 다분히 모더니즘적 맥락에서의 기하학적 추상성을 보여주며, 화면은 물성이 강한 조형적 형식을 탐구하는 양태를 드러낸다. 동판이라든지 두껍게 배접한 대형 한지, 목제 패널, 캔버스 천 등의 매체 위에 원을 형상화함으로써 형식주의 모더니즘의 물성에 대한 탐구를 기조로 한다. 하지만 물성으로서 작품의 본질만을 탐구하는 형식주의적 태도로부터는 살짝 비켜나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서구의 형식주의 모더니즘의 맥락에서는 기하학적 형태와 견고한 물성을 바탕으로 작품의 본질을 논리적으로 추구하는 데 반해 그녀의 작업은 보다 유연성과 가변성을 가진 매체를 사용하면서 생명이나 우주와 같은 비가시적 세계를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매체에 대한 접근 태도는 당시 한국화단에 유행하던 단색화나 모노크롬의 영향과 무관치 않을 것이다. 외형적으로는 서구의 미니멀아트처럼 물성이 강조되어 보이기도 하지만 매체에 대한 인식은 매우 정신적 속성이 내포된 특성이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매체에 대한 그녀의 접근은 초기부터 익숙한 서구 모더니즘의 이론이나 방법론에 매몰되지 않고, 매체를 통해 구현하는 기하학적 형상으로서의 원 역시 순수 형태라기보다는 다양한 상징성을 담고 있다. 그녀의 원은 모더니즘의 매체와 물질 중심적 입장보다는 정신적 세계를, 개념적 세계보다는 그것을 뛰어넘는 규정할 수 없는 초현실주의적 세계에 관한 관심이 내재하여 있었다. 그녀가 대학을 졸업하고 유학을 떠나기 전 자신을 초현실주의적 작가로 규정하고자 했던 입장은 이를 방증하고 있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이자 수학자 피타고라스가 말했듯이 원은 가장 창의적인 형태이다. 시작과 끝이 없고 측면이나 모서리가 없으므로 그는 원을 ‘단일 단위’를 의미하는 ‘모나드(monad)’라고 명명했다. 원을 더 쪼갤 수 없는 우주의 비가시적 본질로 이해한 것이다. 조기주의 작품의 핵심적 요소인 원은 그 비가시적 본질을 형상화한 듯 다양한 변주를 보인다. 원은 인류가 발견한 가장 오래된 기하학적 기호 중 하나인데 수학과 문학, 자연과학 등 인간의 삶의 전 영역에 숱한 상징성을 부여해왔다. 그녀의 원 역시 신성이나 우주의 순환성, 성스러움, 무한성, 역동성 등 복잡한 상징성에 관심을 보이며 피상적 현실을 넘어서는 세계를 표현하기에 적합한 소재로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1991년 《제4회 개인전》에서 선보인 작품 <천지창조(The Creation)>(그림2)는 눈동자 혹은 우주의 심연을 상징하는 원의 형상들 위에 금속 분말로 그래피티를 그려내는 방식으로 에너지의 표출을 형상화하고 있는데, 전시회의 주제인 ‘물질과 정신성’에서 보듯 물질적 속성이 강조된 매체와 크고 작은 원의 형상들을 결합함으로 새로운 존재의 우주적 탄생을 암시하는 화면을 제시하고 있다. 그 시기의 작업에서 원은 우주의 비밀과 원리를 상징하는 속성으로 읽히는데, 물질로 구성되어 있지만 하나의 생동하는 유기체로서 우주를 인식하고 원뿔과 원통의 기하학적 요소들과 거친 물질적 속성이 혼합된 화면으로 본질과 실재를 구현하려 했다. 그뿐만 아니라 2차원의 공간 속에 4차원적 우주를 담고자 컴퓨터 그래픽의 이미지를 결부시킨 회화 작품을 시도하기도 하는데, 4차원이라는 시간성의 문제를 통해 우주의 본질을 탐구하는 작업을 펼친다. 또한 원의 순환성의 문제를 구체화하기도 한다. 이후로 2004년까지 조기주의 작업의 주된 관심사는 우주의 생성과 생명 창조의 문제였다.
대학 졸업 후 1979년부터 시작된 그녀의 뉴욕 프랫 인스티튜트(Pratt Institute)에서의 유학 생활은 이 원과 새로운 매체 실험에 있어 좀 더 복합적인 사유를 자극한 것으로 판단된다. 유학 시절 뉴욕 화단의 주요 전시들은 개념미술이나 팝 아트 등이 주를 이루었고, 개념미술에 대한 난해함을 이해하고 넘어가는 일이 큰 과제 중 하나였지만, 무엇보다도 구겐하임 미술관의 《요셉 보이스(Joseph Beuys)》 전은 그녀에게 큰 충격이었다. 그는 여러 가지 물체를 통해 그것과 삶과의 관계 혹은 정신과 물질과의 관계와 소통에 대해 보여 주었는데, 특히 다양한 매체의 사용과 샤머니즘의 신화와 같은 비합리적 속성들, 그리고 자기 정체성, 예술과 사회적 실천에 대한 보이스의 태도는 큰 도전이 되었다고 한다. 그뿐만 아니라 1980년 가을 브루클린 미술관에서 열렸던 쥬디 시카고(Judy Chicago)의 <디너 파티(The Dinner Party)>를 보고 역시 새로운 자극이 되었다고 한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디너 파티>는 역사 속에서 위대한 발자취를 남겼음에도 불구하고 여성이기 때문에 열등한 취급을 받아왔던 39명의 여성들을 저녁 만찬에 초대한다는 상징적 의미를 지닌 설치작품이다. 초대된 이들은 신화 속의 여신들이나 역사적으로 위대한 업적을 남긴 여성들이다. 미국에서 페미니즘에 대한 논의를 촉발시킨 쥬디 시카고는 조기주 자신의 초기 작업에서 소극적으로 인식되던 여성성에 대한 자신감을 가지게 한 계기가 되었다. 이렇듯 뉴욕에서의 형식주의 모더니즘에 대한 해체적 분위기는 그녀에겐 시각예술 영역의 확산은 물론 현대미술에 대한 근본적인 각성의 시기가 되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그녀의 저서 『이것도 예술이야?』(2004.현암사)와 『이유 있는 미술 시간』(2016.노스보스)는 현대미술에 대한 그녀의 관점이 잘 반영되어 있다.
1990년대에 들어서면 그녀는 이전보다 더욱 다양한 매체 실험을 시도하게 되는데 종래의 회화나 입체작품뿐만 아니라 영상작업을 위한 컴퓨터 그래픽, 그리고 애니메이션과 단편 영화를 제작한다. 그녀의 1990년대 초기의 평면 작업은 형식주의 모더니즘이 가지고 있는 정형성의 탈피를 추구한다. 캔버스 천에 부식한 동판을 연결한 설치작품과 같은 형식의 대형 작업을 추구하면서 전형적인 평면성을 벗어나고 있다.
하나로 연결된 각각의 패널 위에는 이전보다 좀 더 기하학적 정형성을 가진 서로 다른 동심원의 원들이 드러나며, 중첩된 원들은 운동성을 가지고 변주한다. 화면을 구성하는 원들은 종래 동심원을 가졌던 모더니즘적 형태를 인위적으로 어긋나도록 자유롭게 배치하고 있다. 이를 통해 화면은 진동하며 의미를 확장하고 에너지를 발산하도록 하고 있다. 화면은 구리판과 한지 위에 중첩된 원의 형상, 그리고 다양한 낙서가 결부되면서 좀 더 거친 역동성을 보이기도 한다.
이 시기 그녀의 작업 속에 구체화 되기 시작한 또 다른 요소는 연금술적 사유이다. 1991년 개인전 《물질과 정신성-회화의 연금술적 모색,1991》을 준비하며 재료가 가지는 한계에 대하여 고민하던 때에, ‘제의를 통해 재료와의 관계에서 영혼적인 모험을 행하고, 물질의 존재 양태를 바꾼다’는 연금술에 관한 이야기를 접했다 한다. 때마침 새로운 작품을 연구하면서 구리(copper)판을 성형하여 갖은 화학적 조합을 시도하고 있었던 때여서 연금술에 더욱 관심을 가지게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이러한 시도를 통해 그녀는 이전의 작품에서는 느낄 수 없었던 묘한 신비로움을 경험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녀가 초기부터 구리 분말이나 구리판을 즐겨 사용한 이유를 정확히 알 수 없다. 연금술에서 구리는 변화, 여성성, 단순성, 영적 깨달음 등 다양한 상징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고 이러한 의미들은 연금술사들의 심리적, 철학적 탐구와 물질 변환의 과정을 표현하는데 사용되었던 점을 상기한다면, 그녀가 구리를 즐겨 사용했던 이유를 모종의 연금술적 의미에서 찾을 수도 있을 것이다. 이를 계기로 그녀는 이질적 요소들을 포용하여 새롭고 영원한 존재를 추구하고자 하는 생각에서 다양한 종류의 안료나 백묵, 스프레이 페인트, 흑연 등 재료들은 더욱 과감히 작품에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화면에는 연금술의 플라스크와 금속의 용해를 연상케 하는 이미지들이 등장하기도 한다. 연금술은 주지하는 바와 같이 중세에 성행하던 의사과학(類似科學, pseudoscience)으로 물질들의 조성비율을 변화시켜 가며 만든 혼합물을 통해 완전성을 지닌 금이라는 금속을 구하기 위한 시도였다. 연금술은 영원한 생명을 추구하는 태도로 수세기 동안 인간의 마음속에는 “인간이 찾아 헤매지만, 결코 발견할 수 없었던 영원함과 완전함”에 대한 생각이 항상 큰 자리를 차지했다. 물론 이러한 노력은 허사였으나 무수한 가설과 실험, 이에 대한 시행착오로 근대적 화학은 물론 신비주의적 사유와 철학을 크게 발전시켰다. 이것은 현대 포스트모더니즘에 이르러 모더니즘의 합리주의적이며 자연과학적 사고를 넘어서기 위한 효과적인 방법론으로 재소환되었다. 연금술은 피상적으로는 다양한 금속을 섞어 금을 얻기 위한 화학적 발전에 영향을 미쳤지만, 그 이면에는 보통 비밀스러운 어둠 속에서 숨겨진 진리나 지식을 찾는 것에 목표를 둔 신비주의적 사유가 자리한다. 연금술사들은 금의 제조만이 아니라 모든 물질의 변성과정에 대한 지식을 쌓으면서 정신의 변성(완성)도 추구하였다. 연금술은 물질의 변화와 영적인 성장의 유사성을 탐구하는 철학적인 아이디어와도 연결될 수 있었는데, 이러한 아이디어는 현대 심리학과 심리적 성장에 영향을 미친 바 있다. 연금술사들은 자연계의 모든 물체에는 정령이 깃들어 있으며, 생명체는 물론 광물에도 완전하고 본질적인 정령이 존재한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그것을 ‘시금석’ 혹은 ‘투사 분말’ 또는 ‘현자의 돌’이라고 불렀으며, 그 정령은 다른 모든 물질을 자신의 성질로 변화시키는 힘을 갖고 있다고 믿었다. 그들 생각대로라면 만일 금의 정령을 가진 ‘현자의 돌’을 발견한다면 전 세계의 모든 사물을 금으로 바꿀 수 있을 것이었다. 따라서 ‘마이더스의 손’, 즉 현자의 돌을 찾는 것은 연금술사들의 궁극적인 목적이었다. 연금술에 대한 재해석은 상징주의나 초현실주의에 크게 영향을 미쳤고, 1960년대 말부터 포스트모더니즘의 맥락에서 예술작품을 연금술적 사유로 해석하고자 하는 연구들이 수행되기도 했다. 특히 가스통 바슐라르는 물질을 변환하는 예술가의 몽상을 부각시키기도 했는데 이 방법론은 초현실주의의 난해한 작품들을 분석하는 효과적인 가설이 되기도 했었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바와 같이 뒤샹의 대표적인 연구자인 아르투로 슈바르츠(Artro Schwarz)는 뒤샹의 작품세계를 전적으로 연금술과 정신분석학의 이론으로 해석하는 난해한 시각을 보여주기도 했다. 하지만 연금술의 이론들은 대부분 관념의 세계에 머물러 난해함을 부추기는 한계를 드러내는 것이었다.
물질은 어떤 비법에 의해 다른 존재의 양태가 될 수 있다. 비법은 실험적인 것을 되풀이하면서 발견된다. 연금술에서 말해지는 그런 신비주의 비법의 정수는 신이 고통-죽음 그리고 부활로 상징되는 것처럼 그런 종교적 의식을 통해 부활한다는 것이다. 그때 비로소 그 물질의 실체가 물질의 정신이 되는 것이다. 물질은 그 자유가 최고조에 달하여 빛을 얻고 무한 생명을 갖게 되어 물질적 차원에서 정신적 차원으로 승화되는 것이다. (작가 노트)
조기주의 연금술적 사유 역시 피상적으로는 금과 구리 등의 금속이 가지는 의미와 우주에 관한 관심으로 표출되지만, 1990년대 이후부터 그녀는 초기 작업에서 보이던 여성성에 대한 문제와 연금술을 연관을 지어 해석을 시도한다. 그녀는 자신의 조형적 입장을 ‘여성의 연금술’ 이라 말하곤 하는데, 여성적 감성을 통해 이러한 물질의 변환을 꾀하고자 한 자신의 연금술적 사유와 제작 태도를 지칭한 것으로 이해된다. 그녀의 연금술은 물질의 변환이라기보다는 물질을 수용하고 표현하는 태도라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모든 매체나 사물들을 작품 속에 자유롭게 융합하며 포용하는 방식인데, 그녀의 거친 콘크리트와 부드러운 오브제나 물질들의 조합은 그 대표적 어법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측면에서 그녀의 페미니즘은 성적 혹은 젠더적 담론을 기반으로 하였다. 일반적인 정치. 사회적 의미의 그것들과 달리, 1990년대 이후 한국여성주의 미술에서 독자적 의미를 가진 것으로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녀의 연금술적 페미니즘의 태도를 견지하고 있는 초기 작품을 예로 든다면 <연속되나 연속되지 않는(Continued but Discontinued)>(1993)(그림3,4,5,6,7)이라고 명명한 연작들과 <창조>(그림2),<숨겨진 것과 드러난 것> 연작,(그림8,9.10) <상징적 우주>(그림11)와 같은 작품들이 여기에 속한다. 이 시기 화면에는 작가의 강한 수행성과 물성이 함께 나타난다. 화면에 등장하는 원의 다양한 중첩은 우주이거나 공간 속에 퍼져가는 에너지를 형상화하고 하는데 물리학적 질서를 예술로 형상화하고자 하는 의지를 담고 있다. 그녀의 연금술은 서로 다른 이질적 요소들을 혼융하는 것이며 포용하는 것이며 각각의 요소들의 독립성보다는 그것들의 상관관계와 네트워크를 중시하는 태도이다. 우주와 생명은 이질적인 것들의 상호 관계 속에 존립하기 때문이다.
그녀는 상징적 우주에 접근하기 위해 컴퓨터 그래픽을 통한 4차원적 이미지를 제작해 선보이기도 한다. 그녀는 유동적 존재인 우주를 입체적이며 시간성이 개입된 이미지로 제시하고 있다. 그러한 이미지는 정신과 물질을 이분법적으로 인식하지 않고 예술을 통해 이를 통합하기 위한 의지의 표현이다. 1999년 조기주는 그간 추구해 왔던 이미지를 싱글 채널 비디오로 제작하는데, 비디오는 그녀가 그동안 추구해온 다양한 평면적 이미지들에 강한 역동성을 부여하며 우주와 생명, 자연,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물질성과 정신성 등에 대한 종합적 시각을 잘 담아내고 있다. 그녀는 1999년의 개인전 《다시 자연으로(Back to Nature)》에서 첫 영상작품 <초월적 맥(Transcendental Vein)>(그림12)을 발표했다. 빛의 3원색이 순차적으로 노출된 뒤 감산혼합으로 만들어진 검은색 화면으로 시작되는 영상에는 과거 초기 작품의 이미지인 원과 점, 선으로 구성된 정자의 급속한 운동을 품은 난자로서의 우주의 이미지가 형상화된다. 2001년 싱글 채널 비디오 작품 (2001)(그림13-14)에서는 그동안 추구하던 연금술과 여성주의적 맥락을 동양의 음양 사상과 접목시켜 그 밀도와 실험성을 확대하고 있다. 즉 태극권(太極拳)의 손동작, 불・물의 이미지를 병치시켜 ‘생명’과 ‘조화’의 이치를 담아내고자 한 것이었다. 하늘과 땅, 물과 불이라는 음양이 극점에서 서로가 조화와 균형을 이루게 되는 동양철학의 원리와 아리스토텔레스의 4원소설(공기・흙・불・물)에 바탕을 둔 연금술이 지향하던 양성 혼합의 꿈이 다르지 않음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태극권의 동작으로 상징화한 ‘부드러움’과 심연으로부터 거대한 우주를 아우르는 ‘포용적 힘’의 근원인 ‘여성성’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시도라는 점에서 전반기의 그의 작업을 집약한 매우 상징적 작품이다. 두 영상작품을 통해 그녀는 여성성을 보다 대담하게 드러내는 자신감을 얻고 있는데, 2004년 개인전 《화; 化, 和, 火, 花》(그림15)에서 좀 더 진전된 작업을 보인다. 진주나 구슬, 스팽글(얇은 장식 조각) 등 의류나 장신구 등에 사용하는 재료들이 작품의 주요 소재로 사용되면서 화면에서는 낱낱의 작은 원들(구형 또는 반구형의 진주, 구형 또는 반구형의 구슬, 원형 스팽글 등)이 춤추듯 나선형의 회오리나 꽃을 만들어 낸다. 또한 2005년 발표된 ‘우주와 같은 원(Circle)이지만, 몸(Body)으로 비유(Allegory)된 원’을 제시한 작품 < A-B-C >연작(그림16-17)에서는 종래 우주와 순환을, 알이자 자궁을, 또 생명을 상징하던 원이 ‘신체 부위’를 구성하는 외형적 요소인 원으로 시도된다. 눈, 코, 귓바퀴, 목구멍, 배꼽, 유두 등 액체를 분비하는 인체의 기관들로서 이들 원이 거대한 액체의 흐름을 배경으로 형태가 변화하며 유동하기도 하고 독립된 영상으로 부위가 병치 되기도 한다. 그녀의 영상작업은 종전의 가부장적 대우주의 조화나 질서의 세계로부터 인간이란 개별적인 소우주의 원이 가지는 무질서와 일탈에의 욕망을 강렬히 드러냄으로 여성의 관점에서 모더니즘 이후의 혼성성과 다원성의 어법을 구현해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림2) <천지창조(The Creation)>, 1991

(그림3) <연속되나 연속되지 않는-93(Continued but Discontinued)>,1993

(그림4) <연속되나 연속되지 않는(Continued but Discontinued)>,1994

(그림5) <연속되나 연속되지 않는(Continued but Discontinued)> (1995)

(그림6) <연속되나 연속되지 않는(Continued but Discontinued)> (1997)

(그림7) <연속되나 연속되지 않는(Continued but Discontinued)> (1998)

(그림8-9-10) <숨겨진 것과 드러난 것> 연작, 1991

(그림11) <상징적 우주>

(그림12) <초월적 맥(Transcendental Vein)>

(그림13) , 2001

(그림14) (2001) installation view, 2014


(그림15) 2004《화; 化, 和, 火, 花》 & gallery view

(그림16) < A-B-C – Body>, 2005

(그림17) < A-B-C – Face>, 2005
Ⅲ.
매체의 실험과 상징적 형상과 이미지를 통해 연금술적 다원성을 추구하던 조기주가 2008년 들어서면 형상성이 상당히 제거된 백색의 화면을 선보인다. 원형의 화판에 여러 번의 제소를 칠한 백색의 평면 회화가 그것이다. 다시 본질과 규범을 강조하는 형식주의 모더니즘의 근본 문제로 회귀한 것인가? 그녀는 형식주의 모더니즘의 극단이라 할 수 있는 모노크롬의 화면처럼 백색 쉐이프트 캔버스(shaped canvas)를 기반으로 새로운 작업이 펼쳐진다. 지름 20~120cm의 다양한 둥근 합판에 수십 번 제소를 발라 조성된 백색 화면은 일견 텅 빈 캔버스처럼 보인다. 하지만 자세히 보면 제작과정에서 발생한 다양한 행위의 흔적들과 화면의 조성과정에 개입된 요소들이 화면 속에 스며들어 있는데, 더러는 먼지나 붓털이 말라붙기도 하고 자연스러운 액체의 흔적들이 남아 있기도 하였다. 이 흔적에는 때로는 예기치 못한 무의미한 얼룩들이 부가되기도 한다. 그녀는 화면에 남겨진 얼룩이나 매체의 편린들에서 깊은 각성을 하게 되는데 후일 이 작업은 <삶의 흔적(The Stains of Life)>라는 제목의 연작들로 발표되게 된다. 매체에 관한 관심은 창작의 목적을 위해 사용된 재료로서의 매체로부터 출발하지만, 재료로서의 기반 위에 부가시킨 발견된 오브제, 그리고 이를 넘어선 삶의 잉여로 생산된 수다한 사물들과 물질에 관한 관심으로 나아간다. 이것들을 연금술적으로 혼합하여 전혀 새로운 결과물을 만들어 내는 삶의 흔적들에 관한 관심이 그것이다. 화면에 남겨진 ‘액체성이 육화’로서의 얼룩으로부터 그녀는 자신의 여성성의 단면을 발견하게 되고 새롭게 그것들을 작품의 중심 과제 중 하나로 삼게 된다. 얼룩은 존재의 불명확한 흔적으로서 합리적으로 분석될 수 없는 초현실주의적 상상력을 유발한다. 또한 이것을 통해 현상을 해석하고 분석할 때 주체와 대상 간의 차이와 불확실성이 강조된다. 얼룩은 서로 다른 시각적 관점 간의 갭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는 이 개념을 통해 우리는 현상을 다양한 관점에서 바라보며 복잡성을 이해할 수 있다. 그녀의 작업은 얼룩과 흔적을 통해 불확실성과 복잡성, 타자적 사유에 대한 시각적 단서를 포착하고 있다고 여겨진다. 그녀는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지난 시간 떨어내지 못했던 본질과 원형에 대한 사유가 포기되어야 했던 순간에, 밀물치듯 돌아온 삶의 진실들- “작가가 회화의 공간 속으로 불러들인 작업실의 부스러기들(쓰레기들), 굳어버린 물감들, 우연히 화면에 남게 된 이물질들은 회화를 정의하는 전제조건들, 타자였다고 보아야(2008년 양효실 전시서문 중에서)”- 하는 것은 그녀의 말처럼 후기구조주의 그것 – “모더니즘의 시대에 밀려난 삶의 진실들(2008년 양효실 전시서문 중에서)” – 과 다르지 않았다. “불결하고 불안하고 사소한 것들을 사유(2008년 양효실 전시서문 중에서)”하면서 진실한 삶의 재현이, 탈모더니즘적 사고가 이루어지기 시작한 것이다.(작가 노트)
그녀의 작품 속에는 제작과정에서 버려진 부스러기들이나 무용의 사물들이 적극적으로 수용되기도 하고 회화의 주변부로 치부되던 요소들이 적극적으로 수용된다. 의도하지 않은 얼룩과 흔적을 작품의 맥락 속에 적극적으로 수용함으로써 논리적인 의미를 설정하여 작품을 설명하고자 하는 태도로부터 거리를 두게 된다. 아울러 종래의 미적 규범이나 원리가 지배하는 세계를 벗어나 자유롭게 사고의 지경을 넓힌 것이다. 또한 이것은 그녀의 초기 작업에서 관심 가졌던 초현실주의와도 무관치 않다. 얼룩은 스쳐 가는 향기와 같은 것이며 사라져버릴 아름다움을 지니는 것이다. 또한 생의 궁극적 질량인 얼룩을 통해 자신과 우주의 존재를 확인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녀에게 2012년은 매우 획기적인 해라 할 수 있다. 그녀가 이후 주로 다루는 시멘트 패널 작업에 영향을 준 콘크리트 벽면과의 만남이 이루어진 해이기 때문이다. 뜯어진 벽지 속에 드러난 시멘트벽이 주는 강한 인상과 모종의 삶의 흔적들을 담고 있는 표면은 이후 ‘삶의 흔적’ 시리즈를 탄생시킨 에포크가 되었다. 이뿐만 아니라 2018년부터는 도심 재개발지의 건물 철거 현장에서 폐기된 건축물의 파편들을 접하며 받은 강한 느낌도 그녀에겐 새로운 창작의 전기가 되었다. 다른 타인들의 삶의 흔적들과 철근을 포함하고 있는 버려진 시멘트 덩어리의 발견은 이후의 작업에 큰 변화를 가져다주었다. 그녀는 현장에서 주어온 이끼 자국이 가득 담긴 거친 모습의 얼룩진 시멘트 덩어리를 물로 씻는 ‘제례(?)’를 수행한다. 2014년 이후 자신의 작업을 ‘스테인드 시멘트(Stained Cement)’(그림18)로 칭하고 있는데 얼룩이나 흔적이 남겨진 시멘트의 거친 질감과 양감, 그리고 이 양괴에 남겨진 무수한 삶의 흔적들의 층위들은 세계와의 연금술적 조우라 해야 할까. 이후 그녀의 작업은 시멘트 패널이 주된 매체가 된다. 원형이나 정방형의 거푸집을 사용하여 떠낸 시멘트 패널은 그녀의 캔버스가 된다. 거친 패널의 표면엔 무엇인지 형용할 수 없는 형상들이 자연스러운 흔적인 양 소극적으로 그려지기도 하고 금박이나 다른 금속 편, 굳어버린 아크릴 물감을 사용한 드로잉 등 다양한 조형적 요소들이 다소 적극적으로 배치되기도 한다.
피상적으로 보면 패널 위에 그려지는 드로잉들이나 배치되는 물질 또는 오브제는 거친 콘크리트와 조화를 이루기 어려운 이질적인 요소들로 보이지만 서로가 상충되지 않도록 거친 표현과 바탕의 표면 처리에도 공을 들인다. 초기에는 실제 벽의 파편들을 사용하기도 했지만 주로 거칠고 두껍게 제작한 시멘트 패널을 사용한다. 이것들을 벽에 걸기 위해서는 꽤 큰 지지력이 필요하므로 점차 패널의 두께는 얇아진다. 하지만 거칠고 자연스러운 물성을 살리기 위해 정교하게 몰타르의 배합 비율을 조정하여 표면 효과를 살리고 있다. 그녀는 이 거친 콘크리트 화면 위에 원이나 그리드를 그려 넣기도 하고 그동안 실험했던 부식된 동판의 조각이나 원의 형상들을 부착하기도 한다. 경우에 따라서는 시멘트 패널에서 이미지로 느껴진 흔적에 약간의 가필을 하여 숨어있던 이미지를 소극적으로 드러내는 방식으로 개입하기도 한다. 시멘트 패널 위에 부가되는 이미지나 오브제들은 무엇인가를 의도한 것들이라기 보다는 무의미한 또는 우연히 발견된 주변적이고 하찮은 것들로 구성된다. 무의하고 하찮은 것들, 사용하고 폐기된 것들이 작품으로 재탄생하는 것이다.
버려진 것들은 나의 우주에서 재창조된다. 역설적으로 버려짐의 창조는 생명의 순환이며, 우연과 의도의 그 아슬아슬한 균형 안에서 무의미는 의미를 부여받게 된다. 태어남과 스러짐의 흔적은 무한한 반복을 통해 기억된다.(작가 노트)
최근의 작업에서는 그동안 진행해 왔던 형식과 매체의 실험이 콘크리트 위에 혼합된 양태를 보인다. 금박이나 화려한 광물들이 흩뿌려진 패널들은 과거와 미래를 관통하는 시간의 흔적을 연상케하는 화려함을 선사하기도 하고, 첨단 과학과 태고의 이미지들로 구성된 패널이 우주를 향해 상승하는 구조물을 구축하기도 하는 등 시멘트 패널이 적극적인 오브제가 되어 공간에 자유롭게 설치되면서 좀 더 장소에 상징성을 부여하는 의미로까지 확산되기도 한다.
그녀가 흔적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벽에 남겨진 타인들의 삶의 흔적으로부터 읽게 되는 현전 때문이며 그 얼룩이 담고 있는 숱한 삶의 레이어들에 대한 관심 때문이었다. 그 레이어들이 우연한 순간 파편화된 콘크리트 사이에서 포착되었다. 이것은 흔적에서 읽을 수 있는 초현실적이거나 비가시적인 현전이 현실과 어우러진 연금술적 정황의 포착과도 무관치 않을 것이다. 이 흔적은 그녀가 그동안 추구해왔던 유동적이며 규정할 수 없는 존재의 본질과 순간적으로 만나는 접점으로서의 의미로 다가온 것은 아닐까?
흔적은 생명이 머물고 간 후위라 할 수 있다. 지금 현전하진 않지만, 그것으로부터 현전을 유추할 수 있는 존재인 셈이다. 지나간 시간의 저편에 머물렀던 존재의 자취이다. 데리다는 흔적에 대해 단순히 현전도 아니고 단순히 부재도 아닌 것이라 말했고 따라서 흔적은 ‘있다’, ‘없다’고 확정적으로 말할 수 없는 ‘비확정성’(undecidable)인 것이며 또는 있음과 없음 사이에 애매하게 걸쳐 있는 경계선으로 이해했다. ‘비확정성’, ‘경계의 사유’ 등 데리다의 핵심적인 개념은 모두 이 흔적의 개념에서 출발한다. 데리다의 주장처럼 흔적이 현전과 부재 사이의 끊임없는 미끄러짐이라면, 그 흔적 중에 어느 것이 더 우월한 흔적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존재, 진리, 중심, 기원 등 형이상학의 용어들도 역시 완벽하고 충만한 현전이 아니라 한갓 불안정한 흔적의 유희에 불과한 것이다.
조기주는 일상에서 사용하고 버려지는 다양한 사물과 오브제들인 잉여생산물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이를 ‘삶의 흔적’으로 명하며 이것들을 예술적으로 승화시키는 방법에 몰두하게 된다.
버려진 폐기물을 유의미한 것으로 재활용하는 것은 생태학적 의미로도 해석될 수 있다. 그녀의 ‘얼룩이 남겨진 시멘트(Stained Cement)’는 ‘삶의 흔적(The Stains of Life)’ 속 흔적이 가진 4차원적 확대나 상승이다. 여기에는 ‘삶의 흔적’보다는 다소간 긴 시간의 축적이 담겨 있다. ‘얼룩이 남겨진 시멘트(Stained Cement)’는 초기부터 추구해 온 우주의 4차원성의 문제가 지속해서 맥락화 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숱한 층위로 구성된 얼룩이나 흔적은 부재한 현전의 집합이기 때문이며 잉여생산물이 가지는 흔적이 비 확정적인 공간으로부터 시간의 경계로까지 확장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시간성으로의 확장은 그녀가 끊임없이 영상작업에 관심 가지게 하는 이유일지 모른다.
조기주는 이전의 영상작업을 통해 음양의 사상을 개입시켜 인간의 행위와 우주, 예술의 문제를 실험했던 경험을 살려 다양한 애니메이션과 독립영화를 제작하기도 하는데, 좀 더 본격적인 영상작업이 아쉽기는 하지만 그녀의 애니메이션이나 영상작업은 자신이 추구해온 작업에 모종의 개념적 실험을 추가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2015년에 발표된 <big and SMALL> (2015)(그림19)은 독특한 소재의 애니메이션으로 거기에는 왜소한 여자 주인공이 방망이로 덩치 큰 남자를 가격하는 장면, 여자의 그릇을 박살 내는 장면, 소리 지르기, 박수 치기, 원 그리기, 바늘로 두드리기의 장면이 등장한다. 이 작업은 선묘적 애니메이션으로 울림이 크지 않은 잔잔함을 가지고 있지만 그 함의는 그리 작지 않다. 상식적으로 소리가 클 것 같은 장면들보다는 의도적으로 ‘원 그리기’나 ‘바늘로 찌르기’와 같은 작은 동작에서의 음향이 훨씬 크게 제작되어 있다. 제목에서 보듯 큰 것과 작은 것이 소문자와 대문자로 다르게 표기되는데 동작과 소리의 크기가 역전되어 있는 셈이다. 이 작품은 2001년 태극권(太極拳)의 손동작을 활용했던 싱글 채널 비디오 <Hand + Water + Fire>에서와 같이 동양사상을 개입시켜 페미니즘적 관점을 드러내고 있다. 단편 영화 <연속 그러나 불연속 (Continued but Discontinued)>(2006))(그림20)은 경주 남산 부처골에서 발견한 감실여래좌상(보물 제198호)의 따뜻하고 소박한 여인의 모습에 서 착안하여 신라시대의 여인과 발레리나를 꿈꾸는 현대 여성의 삶을 중접시켜 윤회적 삶을 드러내면서도 과거에 종속되지 않고 새로운 인생을 개척하는 여인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데, 이 역시 동양적 사유와 페미니즘적 관점을 결합하고자 한 시도였다. <big and SMALL>(2015)은 노자의 『도덕경』 41장의 문장 “큰 네모는 귀퉁이가 없고, 큰 그릇은 더디게 만들어진다. 큰 소리는 소리가 들리지 않으며, 큰 형상은 모양이 없다.(大方無隅 大器晩成 大音希聲 大象無形)”중 ‘큰 소리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大音希聲)’라는 글귀로부터 착안한 것이다. 작은 시냇물이 흐르는 소리나 아이들이 떠드는 소리는 쉽게 들을 수 있지만 지구가 자전하는 소리, 거대한 해류가 소용돌이치며 흐르는 소리, 큰 강물이 흐르는 소리는 들을 수 없다. 즉 자연의 거대한 소리는 들을 수 없다. 노자에게 그 큰 소리는 온전한 소리로 최상의 아름다움을 나타내는 소리라는 것이다. 큰 소리를 만들어 낼 수 있을 때 도를 이룬 것이라는 것이다. 동양의 음악이 추구하는 세계는 큰 소리를 만들어 내어 자연의 소리에 가까워질 때 온전한 최상의 소리가 되는 것이다. 조기주는 이 애니메이션을 통해 소리의 서열과 이미지의 서열을 전복시키며, 시각과 청각의 부조화를 의도한다. 이는 가부장적 사회의 질서와 전범의 전도를 꾀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림18) <스테인드 시멘트(Stained Cement)>, 2014

(그림19) gallery view, 2015

(그림20) Short film , 2006
Ⅳ.
위에서 살핀 바와 같이 조기주의 작업은 일관되게 뿌리 깊은 서구의 미술 전범이라 할 수 있는 형식주의 모더니즘을 탈피하여 자신만의 독특한 언어를 찾아가는 여정이었다. 그녀의 작품을 관통하는 형식으로서의 원의 개념은 모더니즘과 그 이후를 포괄하는 조형적 요소였는데 초기에는 생명과 우주를 상징하는 물질적 본질과 형식적 근원을 탐구하는 방식으로, 후기에 오면 우주의 역동성과 포용성, 다원성을 구현하는 여성주의적 언어로 사용되었다. 실제로 이러한 작위적 구분을 넘어서 그녀의 심성 속에는 기본적으로 규범에 머물려고 하지 않는 호기심과 자유로움의 충만한 에너지가 분출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평면과 입체, 비디오, 애니메이션, 단편영상 등 다양한 매체에 대한 실험과 조형적 담론에 대한 탐구가 그것을 말해 준다. 그녀의 작품을 견고하게 지탱하는 두 개의 축이 있다면 연금술과 페미니즘적 사유라 할 수 있다. 그녀에게 연금술은 중세적 개념의 의사과학적 의미라기보다는 후기현대적 의미에서의 융·복합적 사유라고 할 수 있고, 물질에 대한 제의적 사유를 통한 정신성의 추구라 할 수 있다. 페미니즘 역시 서구의 근대를 견고하게 구축해온 가부장적 사유와 체계에서 벗어남을 의미하는데 그녀의 페미니즘은 정치, 사회적 의미의 여성중심주의 보다는 사물과 세계를 폭넓게 포용하여 예술로 승화시키는 입장에서의 젠더적 여성주의이다. 그녀가 자신의 작품세계를 ‘연금술적 페미니즘(alchemical feminism)’이라고 칭하는 이유를 이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그녀가 추구한 지난한 매체와 형식실험 역시 연금술적 페미니즘의 문맥 하에서 이야기할 수 있는데, 이는 관념적 태도가 아닌 자기 경험과 삶을 바탕으로 구축된 사유이기 때문에 더욱더 설득력이 있다. 근대 서양의 합리적 사유와 중심과 주변의 이분법적 가치의 위계를 해체하며 중심보다는 주변부의 가치에 애착을 두고 자기 작품 속에 수용하는 태도라든지, 사물들의 관계성을 중시하는 태도라든지, 동양의 음양 사상을 통해 사물을 인식하는 태도라든지, 실체보다 흔적이나 얼룩에 관심을 가지는 태도 등이 그것이다. 2014년 이후 지속해오고 있는 <Stained Cement>에서는 이러한 그녀의 사유가 집중되어 있다. 하지만 그 사유가 관념화되어 경직되었다기보다는 여전히 자유로움을 얻기 위해 열려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인간의 물질문명을 상징하는 거칠고 삭막한 시멘트 콘크리트에서 삶의 흔적을 찾아내어 이를 조형화하는 시각 역시 독특하다. 처음엔 벽지를 뜯어낸 뒤 남은 얼룩과 흔적들로 인해, 후엔 도심 재개발로 드러난 건물의 잔해 속에서 삶의 흔적들과의 조우를 계기로 시작된 것이지만 점차 콘크리트에 조형적으로 새로운 생기를 불어넣는 다양한 조형 실험과 그녀가 체득한 제의적 절차를 통해 매체를 수용하는 연금술적 기법이 이를 가능케 했다. 그녀의 매체를 다루는 방식은 흔적이나 얼룩이 가지는 비확정성과 비현전성의 특성을 가지며 중심과 주변부의 위계를 해체하며, 의도와 우연의 경계선을 넘나든다. 과거와 미래를 관통하기도 하고 지상으로부터 우주로 향한 구조물의 구축 등 자유로운 시공간적 통합이 이루어지기도 한다. 이에 따라 그녀의 무기질의 원형(圓形) 콘크리트 패널은 새로운 생명을 잉태하고 공간에 새로운 생명을 증식시키는 유기적 존재가 되고 정신적 차원으로 승화된 물질이 된다. 그녀가 일관되게 원의 형태를 고집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원은 우주의 모나드로서 고정적인 것 같지만 늘 유동적인 에너지를 가지고 새로운 생명을 낳고 번식하는 알이며 자궁이며, 새로운 우주이기 때문이다. 그녀의 우주와 생명은 여성의 연금술의 세계이다.
김찬동 (현 나주문화재단 대표 / 전 아르코미술관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