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미술 1997년 7월호
조기주 展
1997. 06. 12 – 06. 21
인데 코화랑
화면에 새로운 공간을 실험한다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특히 그것이 본질적인 문제 일 경우 더욱 그렇다. 그런 면에서 조기주가 구축하고자 하는 사차원 공간은 화면이나 조형 언어가 지닌 물리적 논리적 문제에 의해 곧 한계에 도달하기 때문이다.
조기주가 탐색하고자 하는 공간은 사차원이다. 화면에 새로운 세계를 구축하는 어려움 은 미술사를 통해 익히 보아 왔다. 그리고 대부분은 절충이라는 적절한 타협점을 찾아왔다.
그러면 조지주는 어떠한 방식으로 사차원성을 그려 낼까? 사차원이란 곧 시간의 문제 다. 그런데 뭐든지 그려 놓으면 그 순간 돌처럼 굳어버리는 화면 위에 어떻게 시간을 그려 놓는단 말인가? 브라크처럼 동시적 시각에서 본 것들을 하나로 통합하여 그려 낼까? 뒤샹과 같이 연속적인 움직임을 그려 시간을 나타낼까? 시간의 핵심은 물체의 이동에 있다. 움직임 은 시간을 동반하기 때문이다.
조기주는 이런 것을 표현하기 위해 원의 성질에 주목했다. 원의 끝없는 순환성, 이것이 야 말로 조기주가 사차원의 세계를 표현하기에 적합한 소재였다. 그러나 조기주의 작품에서 도 원은 움직이는 실체가 아니다. 그래서 도입한 것이 가현(假現)운동이다. 원의 윤곽선을 중복시켜 움직이게 하거나, 오브제와 이차원적 그림을 대비한 잔상으로 그것을 창조하고 있 다.
그러나 가끔 작가의 고상한 의도와는 달리 오해(?)를 사기도 한다. 오해의 핵심은 바로 그가 표현하고자 하는 사차원의 공간이 우주에 떠도는 행성처럼 읽혀진다는 것이다. 시각 언어로 시간성과 본질의 문제를 다루는 일은 매우 어렵다. 조기주도 선배 화가들처럼 어느 선에선가 타협을 해야 할지도 모른다. 조형 언어의 한계 때문이다. 그러나 본질을 추구하려 는 조기주의 전시는 오늘날 얄팍해져가는 미술계를 반성하게 해주는 좋은 기회였다.
박우찬
미술평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