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발견의 궤적
작가 조기주가 ‘시멘트(cement)’와 만나던 장면이 있다. 도심 한 복판에서 발견한 ‘시멘트 조각’인데, 그곳은 가차 없이 시간을 허물던 건설 현장으로 구리를 사러 간 을지로였다고 한다. 없는 게 없고, 못 만드는 것이 없는 고수들의 보고(寶庫) 청계천 인근이 도시개발에 밀려 털려 나가던 날이다. 작가는 그날의 안타까움을 생생하게 기록하고 있어 ‘시멘트 발견’이 갖는 의미를 실감하게 했다. 폐허 속에서 발견된 시멘트는 부서진 시간과 소멸된 공간의 알레고리라 할 수 있겠는데, 작가는 이를 ’스테인드 시멘트(stained cement)라고 명명하며 자신만의 연금술을 펼쳐간다. 작가는 완성된 결과를 쫒는 것이 아니라 매 순간의 발굴이 곧 완성인, 사물의 숨소리와 우주의 비의를 드러내는 발견의 궤적을 만들어 가는 것이다.
연금술로 이어가는 발견의 궤적은 의사(擬似) 자동기술법이라 할 만한데 우연한 만남의 예기치 않은 관계에서 적절성을 유지해가는 것이 작가의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방법이다. 실크스크린과 함께 드러난 흔적, 흔적을 계기로 이어지는 드로잉, 드로잉으로 피어나는 공간, 완전 색인 금빛으로 통합되는 우주 등 조기주는 구체적인 물질 속에서 우주의 숨소리를 이끌어 낸다(2008년부터 시작된 <삶의 흔적(The stained of life)>연작). 작가가 사용하는 금박은 전일적(全一的이)며 완전하면서도 구체적이고, 고르게 울렁거리는 숨결을 시각화한다.
이 점을 형상으로 표현한다면 알이나 원형이 아닐까 한다. 원, 알, 숨, 금빛처럼 명료한 형태와 분명한 물질감의 구체성(具體性)이 있음에도 그 순도(純度)와 흐름, 전일성에 있어서는 추상이라 할만하다. 컴퓨터 영상을 활용한 <풍자/신체/원(allegory/body/circle)>(2005)에서도 원형을 통해 본질적인 것, 기초적인 것을 제시함으로써 형상을 초월해 간다. 단편영화 작업도 우연적인 만남의 이야기 꼴라주이다(<연속 그러나 불연속>, 2006). 영상의 전개와 구성은 흔적으로부터 지속적으로 생성되는 드로잉 같기도 하고 꿈의 장면처럼 기억의 꼴라주와도 같다. 작가는 아마도 n차원을, 영겁의 시간을 다루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2. 장식의 발견과 불꽃 연금술, 플랑브와이양
플랑브와이양(Flamboyant)은 장식 양식 중 하나이다. 고딕 건축의 창 양식에서 유래한 것으로 불꽃양식이라고 옮길 수 있다. 고딕 건축의 창 양식에서 비롯되었지만, 불꽃처럼 불타오르면서 확산되고 상승하는 이미지는 건축 전체의 이미지로까지 확산되는데, 이는 장식이 실질(實質)을 규정해가는 사례가 아닐까 한다. 그렇다면 불꽃 양식, 플랑브와이양은 스테인드글라스를 통해 세속을 성소(聖所)로 이끄는 상승의 기운 전체를 지시하는 연금술의 용어이기도 하며, 조기주의 ‘스테인드 시멘트’를 뒷받침하는 용어가 될 수 있다. 실제로 조기주의 작품은 장식적이다. 장식이라는 용어를 위계적으로 보아 부차적인 것으로 이해하는 것은 편견이다. 미술사를 돌아보면 장식이 실재를 구성해간 대표적인 사례들이 얼마든지 있고, 시각예술에 있어 이 점은 핵심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당장 바로크만 해도 들끓어 오르는 장식의 과도함이 시대의 욕망과 취향을 증언한다. 실제로 장식 욕망은 모른 척하고 싶은 자기의 이면을 드러내고자 하는 방식 중 하나이다. 이는 무의식이나 우연이라는 이름으로 우리 앞에 등장하기도 한다. 불꽃 양식은 우리의 금관이나 고대 무덤 등에서 발견되는 친숙한 도상이다. 어째든 끓어오르는 모든 장식의 언어를 통칭해 플랑브와이양으로 지시하고 싶을 정도로 ‘흐르고 날리는’ 불꽃의 동세는 시각적으로 강렬할 뿐 아니라 풍요로우며 물질과 정신을 아울러 상징한다. 조기주의 얼룩은 뭉턱하기도 하지만 흐르고 날리면서 상승의 긴장과 방향을 갖는다. 실제로 화약을 터트려 흔적을 만들기도 했는데, 그의 화려한 얼룩과 얼룩이 생성하는 공간을 불꽃의 연금술로 플랑브와이양의 계보에 넣고 싶다.
1990년대 작품에 얼룩이 등장하기는 하지만 시멘트의 발견 이후 응축된 얼룩은 긴장감이 더하고 우연적인 구김이나 주름 등을 형상 언어로 전환시키면서 작가는 실재의 풍경을 구성해간다. 이런 점에서 조기주 작업을 구체와 초월 사이에, 구상과 추상 사이에 ‘새로운 장소’를 만들어가는 작업이라 할 수 있다. <무제>(2018-2021)로 제시된 일련의 작업 표면은 드론 뷰로 본 ‘점으로 축소되는’ 도심의 풍경인지, 풀꽃이 웅성이는 8차선 대로변 보도블록 디테일인지, 어느 골목의 담벼락인지, 홍차와 마들렌을 통해 현실 속에 출현한 기억의 얼룩들인지 등등 이 모든 자유로운 상상이 전개될 ‘장소’인 것이다. 이곳에서 작가는 ‘우연의 원근법’으로 사물을 숨 쉬게 한다. 작가는 어디에선가 ‘계속해 피어오르며, 거듭해 빛을 발한다.’고 말한 바 있는데, 작가에게는 ‘누가, 어디에서’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계속 피어오르고, 거듭해 빛을 발하는’ 생성의 현장과 이 장소의 실재가 중요하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작가가 ‘우연의 원근법’으로 이것을 구축해가는 이것이야 말로 연금술의 다른 말이 아닐까 한다.
3. 알, 원, 숨, 우연의 원근법
구타이(Gutai)의 원동력이던 요시하라 지로(1905-1972)는 원의 작가로 유명하다. 폴 세잔도 ‘원뿔’을 기본으로 상상했고, 멀리 플라톤도 이데아를 설명하기 위해 원을 사용한다. 관념의 영역에서든 구체의 영역에서든 원은 단순명료하면서 다양을 포괄하는 순환과 포용의 도상으로 활용된다. 그렇기에 우리는 척도를 넘어 선 우주를 그냥 원으로, 우주의 순환도 원으로, 세대를 거듭하는 생명의 순환도 원으로 표상한다. 원은 본질의 언어이면서 구체성의 최소단위이기도 한 것이다. 조기주 작업의 중심을 이루는 형상도 원이다. 알, 원형, 퍼져나가는 동심원, 원형의 캔버스 등등 작가는 시종일관 원을 통해 조형의 태도를 담아오고 있다. 작가에게 원은 생명, 숨소리, 흐름 등의 작용(作用)이면서 공간을 실질화한다. 드로잉이 형상을 이끌어내듯, 원이 등장하면서 주변은 꿈틀거리는 공간의 실재가 되어간다. 1999년 발표한 연작, <자연으로(Back to Nature)>((1999. 6.23-7.2, 가산화랑)에 전시된 작품에 원은 화면를 우주로 확산시키는 핵심 도상이자 동력이다. 이 당시 조기주의 작업에서 우주는 자연과 생명이라는 용어로 나타나고 있다. 이 점은 얼룩(stain)이 등장하는 작품에서도 마찬가지 이다(2008.12.1-12.13, 예맥화랑). 화면에 놓인 얼룩은 회화의 현실을 뚜렷하게 드러내는 물감 덩어리이거나 파묵(破墨)의 흔적, 어떤 격정을 남기면서도 ‘의미’에서는 완전히 벗어나 있다. 이 점이 강력한 긴장을 만들어 내는데 이 긴장을 통해 작가는 화면의 실재를 이끌어 내는 것이다. 흐르는 이미지와 그 반동으로 상승하려는 얼룩은 장식이 실질을 지시하거나 피상성이 실존을 드러내는 것과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 비즈나 진주, 구슬, 스팽글 등으로 뒤 덮힌 조기주의 작품(<Ever Changeness in Harmonization>, 2004)도 기억해두자.
흰 바탕의 둥근 패널 위에 올린 수십 번의 짱짱한 밑칠은 얼룩을 당기고 밀치는 장력을 높여 공간의 긴장이 극대화된다. 선 원근법이 관념의 공간을 구축해왔다면. 생성을 다루는 조기주의 우연의 원근법은 사물의 감각과 구체의 공간을 살려낸다. 우연과 동시에 존재케 되는 이 모순된 긴장의 공간을 조기주는 화면의 바깥으로 확장해간다. 가변설치의 방식으로 혹은 바탕 없이 뚫린 작은 틀을 활용해 지표와 같은 조각물을 등장시키는 방식으로 규모의 문제에 얽매이지 않고 알, 원, 숨의 우연의 원근법이 구현되고 있다.
4. 시멘트 제의(cement ritual)
조기주가 처음 시멘트를 만난 것은 벽지를 뜯어내면서 드러난 맨살의 벽, 시멘트 벽이라고 한다. 벽지 때문에 보이지 않았던 시간과 보이지 않았음에도 엄연했던 그 현실을 화면으로 불러내 중단 없는 삶의 진실을 주요한 작품의 언어로 삼으려 한 것이 아니었을까. 나아가 그 엄연한 이면의 현실이 그냥 시멘트라는, 어찌 보면 보잘것없는 물질이라는 현실과 보잘 것 없음의 의미를 환기하려는 것은 아니었을까 한다. 이때가 2013년 정도의 일이라고 하는데, 2018년 청계천에서 다시 만난 시멘트 조각은 방안에서 광장으로 그 상상의 영역을 확장케 한다. 물론 원의 도상은 줄곧, 얼룩은 2013년경부터 모티프로 등장하지만, 조기주 작품에 등장하는 무한, 생명, 순환 그리고 이들의 숨결, 흔적과 동세(動勢)에 담긴 미래 이야기 등은 방안에서 광장으로, 심상에서 현실로 경계를 넘어서는 생성의 경제를 보여주고 있다. 주어진 모든 우연으로부터 생성될, 아직은 결정되지 않은 그것을 운영하는 생성의 경제야 말로 추상과 구상의 구분에서는 드러나지 않는 잠재의 장소를 이끌어 낸다.
조기주에게 바탕의 재료가 시멘트인지 합판인지의 구분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 공간 전체에 펼친 가변 설치인지, 뻥 뚫린 틀에 달린 사물의 진열인지 그 방식도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 조기주 작품에서 드러나는 장식성이 어떤 의미인지, 그것의 고유함과 특징에 대해 ‘동시대 미술의 언어’로서 지속적으로 기술하고 해석하는 일만이 남아 있다.
원형에 더해 최근 방형(方形, 사각형)이 등장하는데 울퉁불퉁한 가장자리가 그대로인 시멘트 패널도 등장하면서 화면 내의 긴장이 더 강화된 듯하고 전시된 현장은 더욱 리드미컬하다. 이 사각형을 보면 사각 위에 사각을 겹치는 작가, 가장 완전한 형태로서의 사각형을 추구한 작가, 말레비치가 떠오른다. 다른 차원 즉 4차원의 그림자로서 우리에게는 사각형으로 제시되는 말레비치의 사각형을 다시 n차원의 추상공간으로 돌려보낸다면 거기에는 숨, 알, 원, 흐름, 기운 등이 알 수 없는 형상으로서 그냥 잠재의 덩어리가 되지 않을까. 작가는 이미 <4차원으로의 여행>(갤러리 인데코, 1997)이라는 전시를 개최한 바 있으며, 당시 출품작 <상징적 우주>(1997)에는 말레비치가 상상했던 방형의 행렬이 떠다니고 있다. 이렇게 본다면 원형과 방형, 그 위에 놓인 얼룩, 흔적들은 다른 차원에서 온 것에 몸을 부여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작가는 실제로 몸을 관찰하고 기록하는 작품을 진행하기도 했는데, 자기 몸의 한계, 그 경계를 척도로 작업을 해 오기도 했다. 초월의 장소이면서 추락의 장소이기도한 몸은 물질이면서 정신으로서 조기주 작품을 은유하는 용어이다. 그렇다면 ‘추상과 구상 사이’에 자리 잡은 그의 작업은 접신(接神)의 경계지대로서 몸과 우주의 동근원적인 파장이 퍼지고 모이는 제식의 장소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자신의 작업을 조기주는 ‘여성적 연금술’이라 부른 바 있는데 지금의 시점에서 이를 ‘시멘트 제식’이라 불러도 무방할 듯하다. 이 제식의 상차림(작품)의 특징과 고유성을 구성하는 것이 ‘여성성’이라면 그것은 어떤 특징을 지니는 것인지 분석의 대상으로 남는다.
5. 화가들, 엄마들, 여자들의 문제를 남기며
조기주 작가는 화가 선배로 모친 이경순 화백과 상당히 많은 이인전을 개최해왔다(2022년 5회째). 화가들의 이인전은 흔한 일이기는 한데, 조기주와 이경순 화백은 화가들이면서, 엄마들이고, 여자들이면서 엄마와 딸 사이이다. 조기주의 작품 주제 중, 여성의 몸을 관찰하고 탐구하며 그것을 기록하는 것으로서 ‘여성성’에 대한 탐구 시기가 있었는데, 엄마와 딸이라는 이 특수 관계가 그에 대해 말해주는 바가 있을까? 아니면 반대로 여성성으로 인해 비롯된 바가 있다면 그것은 어떤 모습일까? 이러한 점이 작품에 어떤 작용을 미쳤는지 궁금하다. 향후 단순히 전시 형식으로 이인전을 이해할 것이 아니라 ‘여성성’의 탐구 영역에 포함시켜 들여다 볼만하다. 여성을 자연으로 이해하는 태도와 물, 불의 이미지와 관련되어 이해하는 경향, 우주이자 그 모태로서 여성을 이해하는 경향 등 ‘여성, 시각이미지, 음성이미지’의 여성들이 흐르는 물소리가 되어(<A-B-C ∥, Ⅲ>, 2005) 은하수가 된다. 여성은 무엇을 원하는지 모든 메타포를 찢고, 또 새로운 메타포를 세워 이야기 될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2021.12. 13
남인숙(미술평론가/미학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