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기주 작업 연대기

#1. 싹트는 여성성 (1979-1989)

  • 여성성의 발견 – 생명의 탄생 / 원과 점 그리고 운동성

나의 작품에서 여성성의 발현은 두 다른 주제를 가지고 있다.

1. 원 – ‘생명의 탄생’
2. 본인의 신체 리듬 주기를 가지고 작업

생명의 탄생 / 원과 점 그리고 운동성
1981년 작품 “무제(81-188)(Untitled-81-188)”

나의 본질적인 탐구와 여성성이 결합된 진정한 나의 대표작품이 될 줄은 그 때는 몰랐다. 내 작품 속의 원이 상징하는 우주, 영원성, 알, 자궁, 그 모든 것에다 어려서부터 가지고 있던 나의 femminist로서의 기질까지 합쳐져, 주체적 창조자로서의 여성성을 넣은 작품을 만들어낸 것이다.

“무제-81-188(Untitled-81-188)” / 188 X 331 / mixed media on canvas / 1981

여기서 난자는 내가 논리의 상징으로 선택한 ‘원’에서 유추된 것이었고 정자는 그 완벽한 원을 부수는 존재인 나의 감성을 대변하는 요소로 선택한 운동성에서 비롯된 점과 선이 보여준 운동성이다. 이렇게 하여 결과적으로 난자와 정자라는 해석이 가능한 재미있는 새 작업이 탄생되었던 것이다.

  • 신체 리듬 주기를 그리다: “Up and Down”

본인의 주기적 신체 리듬의 추상적 표현을 한 작품을 제작
1981년 봄에 제작한 “up and down” 작품이 그것이다.

위에서 아래로 / 61 X 183 / mixed media on masonite / 1981

1981년 봄
기질적으로 일정 주기에 따라 기분이 UP 되었다 Down 되는 작가의 신체 주기를 원형이라는 틀에 그 원이라는 틀을 가로지르는 운동성의 방향을 그림
신체 주기를 추상화시킨 작품
처음으로 원형에 작품을 시도.

1989 Up and Down
한국에 돌아와 1989년 개인전 출품 작 / 캔버스 천을 입체적으로 설치 하여 전시

위에서 아래로 / 582.5 X 240 / mixed media on canvas / 1989

#2. 중성적 구조시대; 모더니즘과 페미니즘의 공존(1990-1998)

  • 벽으로부터의 해방: 중성적 구조 속의 반 모더니즘

전통적 회화가 지닌 평면성으로부터의 탈출
1989년 5월 개인전에서도 캔버스천을 입체적으로 설치 하였는데, 이에 대하여 미술평론가 정병관교수님은 전시 서문에 아래와 같이 언급하셨다.

“…새로운 요소와 완전한 예술성이 함께 보조를 맞출 때 그림은 좋은 방향으로 가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틀이 없는 그림을 시도하는 작업들이 있다. 틀이 있는 그림이 벽면에 항상 걸어야 하는 제약이 있으나 천만으로 된 그림은 칸막이처럼 공중에 걸 수가 있다. 벽면으로부터의 해방이라는 그림의 존재 방식에까지 변화를 가져오는 것인 지는 알 수 없으나 과감한 시도를 하고 있다. 운동과 율동감의 서정적인 표현에서 그림 그 자체의 존재성 문제를 다루는 일종의 혁명적인 분위기를 몇 그림에서 볼 수 있다.

완전성을 지향하면서 혁명은 때때로해야 하는 것이 화가들의 고민일 것이다. 그래서 예술에는 진보는 없고 변화만이 있다고 누군가가 말했을 것이나, 그러나 이 화가의 작업에서는 진보와 혁명이 공존하게 되기를 바란다.”

Continued but Discontinued-93, 360 x 245cm, graphite, copper pigment, alckyd color, Korean paper on canvas and copper plate, 1993

1993년 <연속되나 연속되어지지 않는(Continued but Discontined)>

네 폭으로 나뉜 캔버스 천을 부식한 동판(銅板)과 연결

작품의 제작에서 설치에 이르기까지 연속적으로 그러나 불연속적으로각 패널의 순서를 계속하여 변경하면서 작품이 하나의 중심이나 동심원을 가지지 않도록 구성하였다. 하나의 중심이나 정해진 만큼의 진폭만을 허용하는 모더니즘시대의 관습적 평면회화구조를 종식시키고, 작품이 자유로이 진동하며 의미를 확장・발산할수 있도록 하는 것이 주된 목적

<연속되나 연속되어지지 않는(Continued but Discontined)>이라고 명명한 연작들은 1997년까지 계속

Continued but Discontinued-94, 400 x 260cm, graphite, copper pigment, acrylic, on canvas and copper plate, 1994

1994년에 발표한 연작 <연속되나 연속되어지지 않는(Continued but Discontinued)>에 대하여 관객들이 “마치 악보의 오선지를 생각나게 하는 것이 음악 소리를 듣는 듯 하다”는 이야기를 했을 때에는 큰 반가움을 느꼈다.

연속과 불연속-97, 414 x 240cm, graphite, copper pigment, acrylic color, on linen and copper plate, 1997

1997년에도 무질서와 조화, 연속과 불연속의 화음, 진동하는 음의 울림이 관객에게 전달되기를 바라며 작품을 제작

‘혼돈’과 ‘조화’, ‘물질’과 ‘정신성’, ‘본질’과 ‘실재’. 대립하여 있는 아슬한 경계에 서있다.

  • “액체성을 육화한” 얼룩

(좌) 숨겨진 것과 드러난 것 Ⅲ, 60 x 150cm, oil color, copper pigment, graphite, conte on wood panel, 1991
(가운데) 숨겨진 것과 드러난 것 II, 130 x 60cm, oil color, copper pigment, graphite, chalk, conte on wood panel, 1991
(우) 숨겨진 것과 드러난 것 I, 60 x 140cm, oil color, copper pigment, graphite, conte on wood panel, 1991

2008년 <삶의 흔적(The Stains of Life), 2008>의 전시 서문에 미학박사 양효실이 언급한 것과 마찬가지로 내 작품의 주요한 단서로 작용하는 ‘원’은 어느 하나로 명료하게 평가될 수 없는 모호함을 지니고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1991년에 발표한 세 작품에 등장하는 원과 그 구성에는 두 가지의 큰 공통점이 발견된다. 작품에서 1차적으로 발견할 수 있는 두 층위, (a)구리 안료 등이 형성하는 층위(b)콩테, 흑연, 백묵 등으로 표현한 원의 층위를 뒤덮고 있다는 것. 그리고 상승 또는 하강의 이미지를 그리고 있는 (a)를 (b)가 역으로 진행하는 모습을 띄고 있는 것이다.

이들의 층위가 서로 덮고 덮이며 맺은 관계, 제목과 같이 ‘숨겨진 것’과 ‘드러난 것’의 관계로 표현되어진 작품 위에서는 ‘모호함’을 무기로 모더니즘과 다원주의적인 사유가 충돌, 공존하고 있는 것이다. 이로써 통념적 ‘원’은 사방으로 나뉘어 화면 위에서 재분배된다. 깨어진 원은 육화된 얼룩, 다원주의적 사유의 발현으로 해체되는 한편, 흐르는 액체와도 같은 여성주의적 해석을 수용하게 된다.

  • 연금술 속에 담겨진 여성성

(좌) 이원성에 관하여 I, 80 x 120cm, wood, copper, oil color, oil stick, chalk, graphite, spray paint, 1991
(우) 또 다른 존재양태-Ⅳ (Another Mode of Being-IV) 91 x 91cm, graphite, oil color, charcoal, colored pencil, white chalk, oil stick, copper pigment, on wood panel, 1991

개인전 <물질과 정신성-회화의 연금술적 모색, 1991>을 준비하며 재료가 가지는 한계에 대하여 고민하던 때에, ‘제의를 통해 재료와의 관계에서 영혼적인 모험을 행하고, 물질의 존재 양태를 바꾼다’는 연금술에 대한 이야기를 접하였고, 이는 곧 내게 도전처럼 여겨졌다. 때마침 새로운 작품을 연구하면서 구리(copper)판을 성형하여 갖은 화학적 조합을 시도하고 있었기 때문에이기도 더욱 그렇게 느껴졌다. 정성스런 제의를 거친 구리판을 나무패널에 붙여 작품을 완성하고 나니, 이전의 작품에서는 느낄 수 없었던 묘한 신비로움을 경험할 수 있었다. 다양한 종류의 안료나 백묵, 스프레이 페인트, 흑연 등 재료들은 더욱 과감히 작품에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이로부터 시작한 연금술적 변질의 과정은 비단 재료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었다. 미술평론가 홍지석선생 역시 작품에 등장해온 ‘원’ 자체가 만들어온 차이에 2017년부터 주목하고 있다.

작품에서 우주와 순환을, 알이자 자궁을, 생명을 상징하는 ‘원’은 계속하여 차이를 생성해 왔다. 캔버스에 그림으로 그려져 있을 때로부터 부조형태의 구리판이나 진주가 되었다가, 인체의 구멍이 되고 손동작이 되면서, 그리고 동그란 시멘트 덩어리가 되기까지 모두 그 상징에 충실하면서도 재료와 함께 의미를 함께 확장시켜 온 것이다. 때문에 ‘감성’과 논리’, ‘물질과 정신성’, ‘본질과 실재’ 라는 대응 관계는 ‘원’이 만들어내는 차이로 인하여 한층 더 모호해지고 불분명해질 수 있었다. 더불어 새로운 의미와 관계의 생성, 새로운 ‘실재’와 제 3의 세계를 향한 열망은 더욱 크고 깊어져 왔다.

(좌) 상징적 우주 / 120 x 80cm / computer print, oil color, graphite on wood panel / 1997
(우) 이원성을 넘어서 Ⅲ / 100 x 70cm / computer print, oil color, graphite, copper plate on wood panel with hand-made copper frame / 1997

1997년 개최한 개인전<4차원으로의 여행> 역시 이러한 열망을 담고 있었다. 전시는 컴퓨터그래픽이 제시하는3차원의 가상공간과 평면이 만나 차원의 초월과 조화라는 다소 무모한 도전의 일환으로 이루어졌다.

컴퓨터라는 도구를 활용하여 접근을 구체화한 시도에 대한 기대가 컸던 것도 사실이었다. 컴퓨터라면 이전에는 어떤 도구도 가지지 못했던 놀라운 직관의 힘으로 이원론의 대립이 아닌 조화를 시각화 시킬 수 있지 않을까. 2차원과3차원의 초월하는 조화, 4차원의 단 일부라도 아우르는 구현을 이뤄낼 수 있지 않을까. 나는‘차원의 조화’라는 목표와 연금술을 화두로 더욱 작품과 전시의 준비에 박차를 가했다.

6월 서울의 인데코화랑에서 개최하였던 전시는 재료의 확장으로 가능해진 색다른 경험들을 관객과 공유했다. 컴퓨터그래픽으로 탄생한 생소하고 낯선 가상의 공간이 캔버스 위의 드로잉과 결합 또는 충돌하면서 만들어낸 화면은 작품에 확실한‘공간감’과‘율동감’을 더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공간감’과‘율동감’은 종적으로 나열되고 축적된 흔적, 시간의 흐름에 비례할 수 밖에 없던 화면의 층위들을 무너뜨렸다. 대신, 가늠 불가능해진 화면의 깊이는 횡적 사고의 지평을 열어주었다. 그야말로‘안팎으로 열린 원’이 발원한 것이다.

전시를 마친 뒤, 지금껏의 시도를 통해 성과로 받아들여졌던 것들을 내려놓고 새로운 도전적 과제를 부여받은 듯 지독한 고민을 시작했다. 때마침 「월간미술」7월호에 실린 미술평론가 박우찬의<전시리뷰>는 내 도전의지를 불태웠다.

‘움직임은 시간을 동반하기 때문에, 시간의 핵심은 물체의 이동에 있다’는 박우찬의 비평은 영상 작품을 시도하겠다는 나의 결심을 굳히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더욱 힘주어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1991년의 전시<물질과 정신성-회화의 연금술적 모색>의 서문에 이경성관장(전 국립현대미술관장)께서 언급한대로, 작품의 변모과정은 “운동을 머금고 있는 원”, “움직이는 원”에 의해 스스로 추진되어 왔다는 것이다.

“…운동을 머금고 있는 원, 말하자면 이그러지고 움직이는 원으로 추진 되었다. 1991년에 개최되는 조기주전에도 그의 예술의 바탕이 되고 있는 신앙적 요소는 그대로 지니고 있으나 원의 해체과정이라든가 동판을 사용해서 원을 부각 시켰다는 점 등 다소의 변모가 엿보인다….”

추진체에 의존하거나, 급진적인 변화를 도모하기보다 서서히 진동하듯 변모해 왔다는 점이다. 재료가 가진 고유의 성향이 연금술을 통해 다른 재료를 만나 서서히 무뎌지면서 섞이듯이, 이그러지고 해체되어 자연스러운 조화를 이루게 되었다. 구리에서 진주로, 2차원에서 3차원으로, 공간에서 시간으로 흐르듯 변모하였고, 캔버스에서 출발하여 몸으로 흡수되었다가 삶의 흔적을 머금고 재탄생하기까지 모두 순응의 모험이었다. 여성이 잉태하여 출산하듯, 자연의 섭리를 닮은 조기주의 연금술은 이미 영상과의 대면을 준비하고 있었다.

#3. 여성성이 드러난 새로운 미디어(Feminine Media): 1999~2007

  • 영상 속의 생명성

1999년 개인전“Back to Nature” 개인전에 출품한 첫 영상작품 “초월적 맥(Transcendental Vein)”

작가 조기주 사유의 핵심을 이루는 ‘여성성’과 ‘조화’의 키워드는 다시금 작품의 전면으로 나서게 되었다. 때문에 작품은 ‘페미니스트’로서의 기질적 면모를 십분 담아내어, ‘주체적 창조자로서의 여성성’을 드러내는 일에 천착하게 되었다.

초월적 맥(Transcendental Vein) / Single channel video / 4 min. 53sec. / 1999 View video

1999년, 개인전 <다시 자연으로(Back to Nature)>에서 첫 영상작품 <초월적 맥(Transcendental Vein)>을 발표했다. 색의 3원색인 빨강(magenta), 노랑(yellow), 파랑(cyan)이 배경처럼 순서대로 등장하였다가 3원색의 감산혼합으로 만들어진 검정색 화면이 스크린을 가득 메우는 것으로 영상은 시작된다. 검정 스크린이 페이드아웃하면서 하얀 화면 위에 모든 조형의 기본단위이자, 가장 작은 원 ‘점’이 이를 대체하여 등장한다. 점은 연속되어 선이 되고, 이내 ‘정자’가 되어 운동하며 회화작품 속으로 뛰어든다. 회화작품은 배경에서 우주이자, 알이자, ‘난자’가 되어 ‘정자’를 품는다. (특수촬영기법을 적용해 1983년 에미상을 수상한 바 있는 다큐멘터리 ‘The Miracle of Life’에서 정자가 난자로 질주하는 장면을 발췌해 사용하기도 하였다.)

Hand + Water + Fire / Single channel video / 9 min. 45sec. / 2001 View video

2년 후 2001년에는 단채널 비디오 “Hand + Water + Fire”(2001)를 발표하게 된다. 태극권(太極拳)의 손동작, 불・물의 이미지가 병치하는 9분 남짓의 영상 작품은 음양(陰陽)의 원리로부터 발견한 ‘생명’과 ‘조화’의 이치를 담아내고자 한 것이었다. 천(天)이 되고 지(地)가 되는, 불(火)이 되고 물(水)이 되는 양(陽)과 음(陰)이, 극점에서 서로가 되어 조화와 균형을 이루게 되는 동양철학의 이치와 아리스토텔레스의 4원소설(공기・흙・불・물)에 바탕을 둔 연금술이 지향하던 양성 혼합의 꿈이 다르지 않다는 것은 작품의 제작 방향을 결정하는 데에 큰 기여
태극권의 동작으로 상징화한 ‘부드러움’과 심연으로부터 거대한 우주를 아우르는 ‘포용적 힘’의 근원인 ‘여성성’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시도라는 점에서 의욕적으로 진행된 작품

두 작품 <초월적 맥>과 <Hand + Water + Fire>를 통하여 새로운 표현 매체였던 영상을 만나면서 ‘여성성’은 이전보다 대담하게 작품에서 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

개인전 (금호미술관, 2014) 영상작품을 모아 전시했던 지하1층의 전시 전경.
(왼쪽 2개) “Hand + Water + Fire”(2001) View video
(가운데) 단편영화 “연속 그러나 불연속”(2006) View video
(오른쪽) ”A-B-C II, III ”(2005) View video

  • 진주, 구슬, 비즈 같은 재료 (Feminine Materials)

(좌) Harmonized Flower / 21.8 x 21.8 x 3.5cm / mixed media on wood / 2004
(우) Ever Changeness in Harmonization / 540 x 193cm / mixed media on wood / 2004

2004년, 서울의 인데코갤러리에서 가진 개인전 <화; 化, 和, 火, 花>에서 선보인 작품들로 진주나 구슬, 스팽글(얇은 장식 조각) 등 의류나 장신구 등에 사용될 법한 재료들이 작품의 주요 소재로 채택해 사용
화면에서는 낱낱의 작은 원들(구형 또는 반구형의 진주, 구형 또는 반구형의 구슬, 원형 스팽글 등)이 춤추듯 나선형의 회오리나 꽃을 만들어냄

  • 신체를 예술 작품으로: ”A-B-C”

삶의 지근거리로 확장된 예술의 경계는 영상작품에서 보다 과감한 모습을 드러냈다. 우주와 순환을, 알이자 자궁을, 또 생명을 상징하던 ‘원’이 2005년에 제작ㆍ발표한 영상설치작품에서 ‘여성의 신체와 원’으로 시도된 것이다. 삶과 맞닿은 곳에서 마주하게 되는 근원적, 본질적 단면을 새롭게 조명해보려는 시도였다. ‘우주와 같은 원(Circle)이지만, 몸(Body)으로 비유(Allegory)된 원’은, 알파벳 이니셜 A, B, C와 같이 쉽고 기본적인 것으로부터의 접근을 통해 의미를 찾고 있었다.

(좌) “A-B-C-I-BODY” / dimension:100 x 123.5 x 58.1cm / 40 min,. / 3 TV Monitors / 2005
(우) “A-B-C-IV-Face“ / dimension: 171 x 173.5 x 58.1cm / 6min. each / 6 TV monitors / 2005

편집 기법, 설치의 형태와 피사체에 따라 , , 등 다양한 시리즈로 제작되었던 해당 작품들은 미학박사 양효실이 지칭한 바, 육화되어 나온 원들은 눈, 코, 귓바퀴, 목구멍, 배꼽, 젖꼭지-로써 개별성과 구체성의 세계에서 무질서와 일탈에의 욕망을 강렬히 드러냈다. 이전의 영상작품 <초월적 맥>에서는 과거의 회화작품을 끌고 와 등장시키기도 하였던 데에 반해, 녹음부터 촬영과 편집의 전 과정을 작품을 위해 새로이 구성∙수행하고 표현 양식과 주제를 확장하면서 혼성성, 다원성으로 대변되던 당시의 예술 흐름에 더욱 적극적으로 동참하려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그 구상들은 아직 머릿속을 맴돌고 있지만 당시의 작업 수기에 기록하였던 대로, ‘정지된 화면이 주는 추상성과는 다른 느낌을 감상자에게 직접 전달해 줄 수 있고, 영상에 밀접한 신세대 감상자들에게는 훨씬 쉽게 다가갈 수 있으리라 기대하였던 믿음’만큼은 ‘육화된 원’과 함께 ‘대중과의 소통’, ‘예술적 실천’의 길로 지금까지 이어져 왔다.

  • 예술적 실천으로서의 저서 출간: 『이것도 예술이야?』

‘여성성’을 필두로 하는 대중과의 소통, 예술적 실천의 길은 두 가지 색다른 도전을 가능하게 함
첫째, 저서 『이것도 예술이야?』의 발표
두 번째는 2006년 발표∙상영한 단편영화 <연속 그러나 불연속>의 제작

『이것도 예술이야?』 / 조기주 지음 / 188 p., 현암사 / 2004

2004년 발표한 저서 『이것도 예술이야?』는 작가로, 선생으로 살 예술에 관심이 있는 대중을 위한 예술적 실천의 하나

돌이켜보면, 『이것도 예술이야?』의 발표는 당시 작가로서 고민하던 쟁점들, 내면으로부터 또는 관객으로부터 수없이 들었던 ‘왜 이런 그림을 그렸을까’라는 질문에 대한 답이자, 소통의 도구로 역할을 기대하며 저술함

‘여성성’을 전방위에 내세우면서 구체화했던 탈모더니즘적 사고에 대한 해설이자, 그 사고의 실천

두번째 예술적 실천, 단편영화 <연속 그러나 불연속(Continued but Discontinued)>은 일반대중과의 괴리가 존재하고 있음이 분명하였던 과거의 영상작을 대신한 시도
경주 남산 부처골에서 발견한 감실여래좌상(보물 제198호)의 따뜻하고 소박한 여인의 모습, 그리고 우리 주변에서 숨쉬고 있는 듯한 친근함에서 영감을 받아 극본을 쓰고 감독, 제작은 물론 영화 주제가 작곡까지 시도함
내용은 발레리나를 꿈꾸는 당찬 여학생 최아라(이다현 분)와 그녀의 전생이자 부처가 된 순종적 신라시대 여인 최씨의 삶을 끊임없이 중첩하여 보여주면서 윤회의 삶, 그러나 과거에 종속되지 않고 새로운 인생을 개척하는 여인의 이야기를 담고 있었다.

연속 그러나 불연속 (Continued but Discontinued), DV, 20min. View video
-극본/감독/제작/주제가 작곡_조기주
-조감독_정치영 / 촬영감독_정치영, 이희영 / 촬영부_김성우, 전진표 / 편집_정치영, 박정규, 정훈민
-스토리보드/스크립터_정철규 / 장소 장소섭외 및 차량지원/조명_박정혁 / 음향_한조영 / 소품_오택관, 권정주 등.

‘발레 동작과 중첩되는 꽃비 내리는 전생의 장면이 너무도 아름다워 한 폭의 그림과도 같았다는 관객’, ‘여대생 최아라의 당찬 모습에 기분이 다 좋았다는 관객’, ‘영화 속 어머니(왕신영 분)의 마음이 이해가 가더라는 관객’의 감상평은 그간 선보인 전시회에서 접했던 것과는 사뭇 다른 것이었다. 다소 추상적이거나 에두르는 듯 이야기하던 관객의 반응은 구체적이고 직관적으로 돌아왔다. 이로써 조기주가 사유하여 온 ‘거시-미시 자연의 연속성’, ‘소우주-인간과 광활한 우주’, ‘생성과 반복’의 주제는 6MM 디지털캠코더로 촬영한 단편영화를 통해 스토리, 색채, 구도 등 드라마적 요소들을 입게 되면서, 예술적 소통의 새로운 통로를 확보하는 듯 하였다.

#4. 삶의 흔적 시대 (The Stains of Life ): 2008-2013

‘기본에 충실하자’라는 생각에, 가지고 있던 둥근 합판 위에 젯소를 바르고 또 발랐다. 그렇게 뽀얀 얼굴을 갖게 된 합판이 수십여 개. 더러는 먼지나 붓털이 말라 붙기도 했고, 더러는 젯소의 얼룩이나 괴어 둔 틈을 타 묻은 다른 물체의 흔적들이 배어난 경우도 있었다. 얼마 후, 그렇게 아프고 힘든 날의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하게 된 둥근 합판들은 <삶의 흔적(The Stains of Life)>라는 제목의 전시로 세상에 선보임

  • 탈모더니즘-The Stains of Life(2008), 흔적 속에 담겨진 여성성

(좌) The Stains-08120-grp, 120cm diameter, mixed media on wood, 2008
(우) 작업실 전경, 2008

「월간미술」에 기고하였던 미술비평가 이근용 역시 ‘완전한 변화’를 일궈낸 요인에 주목함

스스로도 내려놓을 수 밖에 없던 절박하고 고단한 상황에서 나와 주변을 돌아보았을 때 발견하게 된 것, 일상의 사소한 흔적들이 대변하고 있던 것들이 작가 고민의 실마리
작가본인의 논리적 기질과는 다른 ‘여성성’, ‘여성주의적 인식’들이 힘을 발휘하기 시작함

조기주의 작품은 끝내 ‘여성주의적 인식’을 입고 모더니즘이라는 낡은 시대정신으로부터 헤어나오게 되었다. 미학박사 양효실이 작성한 전시의 서문에서는 이점을 조금 더 구체적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개인전 <삶의 흔적(The Stains of Life)>에 앞서 미학박사 양효실과 작업실에서 진행한 인터뷰 장면 / 2008.10.

지난 시간 떨궈내지 못했던 본질과 원형에 대한 사유가 포기되어야 했던 순간에, 밀물치듯 돌아온 삶의 진실들-“작가가 회화의 공간 속으로 불러들인 작업실의 부스러기들(쓰레기들), 굳어버린 물감들, 우연히 화면에 남게 된 이물질들은 회화를 정의하는 전제조건들, 타자였다고 보아야”하는것 – 은 그녀의 말처럼 후기구조주의 그것 – “모더니즘의 시대에 밀려난 삶의 진실들” – 과 다르지 않았다. “불결하고 불안하고 사소한 것들을 사유”하면서 진실한 삶의 재현이, 탈모더니즘적 사고가 이루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이로써 존재할 지 모르는 본질에 대한 탐구와 도전을 끝내어 버렸는지도 모르겠다. 지금, 여기에 대한 가장 솔직한 고백이 되면서 얼핏 아무것도 남지 않은 화면, 어렴풋한 흔적만이 지난 시간을 방증하는 작품은 어느 틈엔가 “지배하고 영토화하려는 남성과 달리 패배자의 자리로 물러나야 하는 것들을 기억하려는 몸짓”이 되어 탈영토화를 꿈꾸게 되면서, 새로운 도전의 출발선 앞에 놓이게 된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몸이 많이 나빠지면서, 그 출발선에서 나는 잠시 휴식기를 가져야만 했다.

  • The Stains of Life-Alchemy(2012), 다시 찾아낸 의미

The Stains of Life-Alchemy, 한벽원갤러리 전시 전경, 2012
(우) Untitled-0812900, mixed media on canvas, 143 x 900cm, 2012

약 3년간의 휴식 끝에, 2012년 한벽원갤러리에서 비교적 큰 규모의 개인전 를 개최할 수 있었다.
두 구역으로 나뉘어진 갤러리의 구조에 맞춰 한편에는 가로변이 9M나 되는 대형 작품을 위시로 한 연작들을, 다른 한편에는 2008년 새로 선보인 바 있던 원형판과 드로잉 설치 작품을 전시했다.
몸이 조금씩 회복될 쯤 전시에 내걸 대형 작품, 을 구상하여 제작이 한창일 때에 작업실에 방문한 양효실박사는 “이렇게 큰 작품을 만드는 작가가 있느냐?”고 물을 정도였지만 작품의 크기는 사실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삶의 활기를 되찾아 그림을 그릴 수 있다는 자체, 있는 힘껏 생명의 힘을 표현한다는 것에 의미를 둔 시도였다. 이 대형 작품에서는 과거의 작품과의 외면적 유사성을 찾는 것도 어려운 일이 아니었지만 그것 또한 내게는 무의미한 일이었다.
당시 전시장을 찾았던 최효극기자(현 뉴시스 통신사 편집국장)가 남긴 감상평의 한 구절이 기억에 남는다.

“…눈길을 끄는 9M 길이의 대형 작품 속에선 기하학적으로 나뉜 선들이 크고 작은 원들과 곳곳에서 조우하며 서로를 받아들인다. 이 음악적 조화(코스모스)의 세계에 난데없이 덩어리 진 심해의 색채가 뛰어들어 혼돈(카오스)을 불러 온다. 이런 조화와 혼돈의 동거는 낯설면서도 너무나 익숙한 생명의 연대기를 보여준다…”.

조화와 혼돈의 동거, 낯설면서도 익숙한 생명의 연대기. 작품은 어느 샌가 ‘지금’의 또 다른 고백이 되어 있었다. “너에게 우주는 어떤 거야? 그것을 안다고 할 수 있어? 물감의 미세한 터치와 선들로 우주의 순환과 질서에 대한 터질듯한 내 생각들을 드러내고 싶었지만 과연 얼마만큼 그게 가능했을까? 우주를 생각하면서 왜 자꾸 나는 반복해서 원을 그리게 될까? 어느 새 습관이 되어버린 걸까? 나는 붓을 잡고 물감을 뿌릴 때, 설치를 하고 영화를 만들 때, 어떤 새로운 시도를 할 때 희열을 느껴. 몬드리안(Piet Mondrian)이나 말레비치(Kazimir Malevich)는 어땠을까? 생명과 자궁과 우주는 하나잖아? 그런데 말이야, 거대하다고 말하기도 어려운 우주 속에서 난 이 끝없는 광대함을 어떻게 이 작은 캔버스에 담아낼 수 있을까 고민을 했었어. 마음과 힘을 다해서 표현해도 사람들에게 그게 제대로 전달되는지 정말 잘 모르겠어. 절박함 속에서 찾은 건 ‘솔직하게 자신을 드러내기’였어. ‘생명과 삶’이었지. 삶과 죽음, 소우주와 대우주, 연속과 불연속 이런 거대 담론들 속에서 나는 그저 스쳐 지나가는 작은 존재일 뿐이지만 그렇기에 더욱 더 그 마음을 뺏기는 것일지도 몰라.” 전시를 앞두고 김미경교수(煎 한국근현대미술연구소KARI 소장, 강남대교수)와 나눈 대화에서 나는 이렇게 고백하고 있었다. 절박함에서 찾은 솔직한 드러내기, 생명과 삶. 작품은 더 이상 거대 담론에 견주어 설명할 일이 아니었다.

The Stains of Life-Alchemy, 한벽원갤러리 전시 전경, 2012
(좌) Untitled-12120, mixed media on wood panel, 120cm diameter, 2012
(우) 드로잉 설치 전경, 250 x 500cm, 2012

전시장의 다른 켠에서는 2008년 <삶의 흔적(The Stains of Life)>을 개최하며 처음 발표한 바 있던 원형판 작품들의 새로운 연작들과 드로잉 설치작품을 선보였었다. 초기작들에서 ‘물질’과 ‘정신성’의, ‘본질’과 ‘실재’의 조화를 일궈내려 시도하였던 조기주의 연금술은 여기에서 다시금 시도되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 버려지고 남겨진 것들, 의미를 다 한 것들, 패배자의 자리로 물러나야 하는 것들(양효실, 2008)이 ‘정신성’이나 ‘본질’ 따위의 것을 대신하고 있었다. 삶과 흔적, 여기에서 도태된 것들까지도 조기주의 품에서 연금술을 거쳐 예술작품으로 거듭나고 있었다. 더러는 형상을 좇아 작품에 대해 ‘짙푸른 벽 위에서 보름달’이나, ‘초원을 누비는 사자’와 같다는 감상을 내놓기도 하였으나 작가 조기주의 의도는 화면 어디에도 없었다. 저자는 죽고, 그리기는 최소화되어 해석의 경계를 흐리고 있었다. 미술학박사 안대현의 말대로라면 오롯이 ‘사유의 태도’만이 화면에 남아 있었다.
여기 지금 살아있음을 증명하는 일, 그 흔적으로 삶을 일깨우는 일, 모든 의도를 뒤로하고 펼치는 조기주의 연금술이 전시의 가장 중요한 목표였다. 그리고 그것은 삶과의 진솔한 마주함을 통해 또 다른 울림을 포착하는 일이었다. “멈추어도 멈추지 않는다, 진정 살아서 호흡하라- 조기주의 작업과 생각들에 관하여”라는 제목으로 작성한 미술사박사 김미경 서문의 말미에는 아래와 같이 쓰여있다.

그녀의 붓질들과 물감은 소리 없는 음성이 되어 쉴새 없이 나에게 소근거리고 있었고, 그것이 바로 나에게는 분명한 그녀의 ‘예술 행위’이자 ‘예술 과정’이었다. 가까이, 눈과 정신으로 보라. 내게 나지막이 힘 있게 건네는 영혼의 소리를 듣는다. “난 살아있어. 살아있다는 건 멈추어도 멈추지 않는다는 거야. 진정 내가 할 수 있는 건 살아서 호흡하는 거야. 너처럼. 우주처럼.”

‘거대 담론과 추상적 언어를 통해서 그녀의 작업을 이해하는 방식은 너무 기운 빠지는 일’이라며, 멀리서 보기보다는 가까이에서 ‘작가의 내면을 촉각적으로, 직접 눈으로 보아야 한다’는 그녀의 평가는 살아 호흡하는 ‘삶’ 자체가 된 나와 작품에게 보내는 응원의 메시지가 아니었을까.
응원에 힘입어 간신히 붙은 호흡을 이어가듯 살아있는 흔적들을 보듬는다. 어머니처럼 따뜻하고 부드럽게. 그리고 나도 그 소근거림에 귀 기울여본다. “난 살아있어. 살아있다는 건 멈추어도 멈추지 않는다는 거야. 진정 내가 할 수 있는 건 살아서 호흡하는 거야. 너처럼. 우주처럼”

#5. 스테인드 시멘트 (Stained Cement); 2014 이후

  • 여성적 감수성 극대화: 여성의 연금술 (2014~현재)

2014년 개최한 금호미술관에서의 개인전 <삶의 흔적: 1998~2014(The Stains of Life: 1998~2014)> 1층 입구 공간 ‘Untitled’ 총 21점의 시멘트 작품들

2014년 개인전 <삶의 흔적: 1998~2014 (The Stains of Life: 1998~2014)> 1층 전시 전경, 금호미술관, 2014

2014 금호미술관 1층 gallery view

쓸모 없다고 손가락질 받고, 외면당하던 것들에도 예술가가 의미를 부여하는 순간 전혀 새로운 것이 (재)탄생한다. 산업 재료인 시멘트 위에 여러 물질들을 얹어 여성의 연금술(woman-made alchemy)을 보여주는 전시

2016 한전 전시 뷰

‘변함없는 둥근 것들, 그 차가운 시멘트들이 숨을 쉬며 꿈틀대는 것만 같다’

2017년 전시서문, 미술 평론가 홍지석

Untitled-1733-grd-01, graphite, pigment, glue, acrylic colors on cement panel, 33 x33 cm, 2017

(좌) Untitled-1851-grd, graphite, pigment, glue, acrylic colors on cement panel, diameter 51cm, 2018
(우) Untitled-1768-brk, graphite, pigment, glue, acrylic colors on cement panel, diameter 68cm, 2017

(좌) Untitled-1870-am, iron net, graphite, pigment, glue, acrylic colors on cement panel, 70 x70 cm, 2018
(우) Untitled-1870-cm, copper, iron net, graphite, pigment, glue, acrylic colors on cement panel, 70 x70 cm, 2018

2018년 개인전 <삶의 흔적 2018(The Stains of Life 2018)> 전시 전경, 갤러리오. 2018

  • 여성의 발언: 애니메이션 필름
“무제-0130(Untitled-0130)” / “무제-0200(Untitled-0200)”

2014년 제작한 2개의 애니메이션 필름작품

태극권(太極拳)의 손동작을 담은 “무제-0130(Untitled-0130)”
손바닥 위에서 일어나는 ‘우주의 탄생’, ‘생명의 창조’등을 보여주는 “무제-0200(Untitled-0200)”

‘생명과 창조의 순환’이 손에 닿을 수 없이 먼 어딘가가 아닌, 바로 여기-내 삶 속에서(손바닥 위에서) 펼쳐지고 있음을 다시 한번 힘주어 이야기하고자 했다.

2014년 개인전 <삶의 흔적: 1998~2014(The Stains of Life: 1998~2014)> 지하1층 전시 전경, 금호미술관. 2014
(좌) Untitled-0130, animated film, 1min., 30sec., 2014 View video
(우) Untitled-0200, animated film, 2min., 2014 View video

“큰 네모는 모가 없고, 큰 그릇은 더디게 만들어진다. 큰 소리는 소리가 들리지 않으며, 큰 형상은 모양이 없다.”
大方無隅 大器晩成 大音希聲 大象無形

“big and SMALL”(2015)은 노자의 도덕경 41장 중 한 구절 ‘대음희성 (大音希聲)’ 으로부터 착안하여 제작한 영상이었다. 주인공인 여성이 등장해 ‘방망이로 남성을 가격하는 모습’, ‘그릇을 던져 부수는 모습’, ‘소리지르는 모습’, ‘박수치기’, ‘원 그리기’, ‘바늘로 찌르는 모습’ 등을 보여준다. 가장 큰 소리가 나는 방망이로 남자를 가겨하며 ‘나뻐’라고 하는 장면은 아무 소리가 나지 않다가 여자가 그릇을 부수거나 소리를 지를 때에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그러다 점점 소리가 커져 원을 그리거나 바늘로 찌르는 모습을 보여줄 때에는 요란한 소리가 동반된다. 상대적으로 왜소한 모습의 주인공 여자가 방망이를 두들겨 덩치 큰 남자를 제압하기도 한다. 영상에서 보는 것, 듣는 것의 일반적이고 상식적인 위계는 완전히 뒤바뀐다. 미학박사 양효실이 영상을 발표한 전시의 서문에 언급하였던 대로, 영상은 “카메라 워크와 사운드의 인위적 조작을 통해 가시화함으로써 소리의 인간성을 문제”삼고자 했다. ‘상식과 봄의 인간성은 해체’하는 한편, 잠들어 있는 ‘감각’을 ‘재구성(재배치)’ 깨워내려는 시도였던 것이다.

Big & SMALL, animated film, 1min., 38sec., 2015 View video

우는 어머니와 괴로운 듯 소리치는 딸, 가운데의 내 모습이 함께 보여지는 첫 번째 시퀀스. 웃는 나와 이를 의아한 듯 바라보는 딸의 모습이 그려진 두 번째 시퀀스. 스마트 폰에 열중한 딸을 향해 연로한 어머니가 딸이 무슨 말을 건네는 것으로 착각하고 계속해서 말을 거는 모습을 그린 세번째 시퀀스. 세 개의 시퀀스가 이어지는 영상은 세 등장인물 – 어머니, 나, 딸의 관계를 통해 현대인의 ‘소통 부재’, 작가로서 겪고 있는 소통의 고민을 이야기했다.

Mom & Daughter, animated film, 1min., 30sec., 2015 (전시전경, 한전아트센터, 2016) View video

끝내 그 해답이 어디에 있는지 알지 못하고 의미와 이유를 찾아 멈추지 않는 우리 삶에 대한 이야기를 담은 영상은 이를 은유적으로 표현한 손가락의 행로를 그리고 있다.

Untitled-16-fn-0148, animated film, 1min., 48sec., 2016 (전시전경, 예술공간 봄, 2016) View video

“… 수많은 원들은 차이의 선(線)을 그리며 생명의 출산(出産)을 거듭해왔다. 계절이 돌고 돌아 또다시 가을이 찾아왔으나 그 가을은 지나간 가을과 같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지나간 가을과 퍽 닮았으나 지나간 가을은 아닌 것이다. …”

미술평론가 홍지석 2017년 전시 서문 중

“… 그것이 작가의 명민한 타협인지 무의식적인 분열의 증거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분명한 것은 모더니즘의 틀 밖으로 벗어나려는(삐져나온) 의지와 욕망이 화면에 흔적을 남기고 있다는 것이다. 이미 초기에서부터 논리 정연한 선과 원으로 이루어진 세계를 가로지르는 어지러운 곡선과 얼룩들은 있었고 분비물을 흘리는 신체의 원들(구멍들)에 대한 집착을 보여주는 영화적 작업들, 평면의 화면에서 튀어나와 자신의 물성을 드러내는 진주와 비즈로 이루어진 작업 등에서 무질서와 일탈에의 욕망이 드러난다. 이제 원은 견고한 형태를 고집하는 것이 아니라 분비물을 흘리면서 삶의 형태들을 입으면서 개별성과 구체성의 세계로 내려앉고 있는 것이다. 액체와 구체적 형태를 지향하는 원은 이제 원형이나 본질이 아닌 냄새와 불결함, 생생함을 육화할 것이다. …”

2008년 미학박사 양효실의 <삶의 흔적(The Stains of Life), 2008>의 전시 서문 중

“…데리다를 위시한 후기구조주의자들은 중심의 자리를 차지한 가치들이 중심이기 위해서는 그 중심보다 먼저 항상 주변부의 사소한 것, 무의미한 것, 개별적인 것이 인식론적으로나 존재론적으로 먼저 있어야 한다는 것을 다양한 방식으로 드러냈다. 회화를 회화이게 만드는 것이 사실 회화에서 밀려난 것들이라면 작가가 회화의 공간 속으로 불러들인 작업실의 부스러기들(쓰레기들), 굳어버린 물감들, 우연히 화면에 남게 된 이물질들은 회화를 정의하는 전제조건들, 타자였다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 후기구조주의는 모더니즘의 시대에 밀려난 삶의 진실들, 불결하고 불안하고 사소한 것들을 사유하려는, 그런 점에서 삶을 재현하려는 시도이다.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시도. 개별성과 직접성, 무의미한 것들을 포착하기란 사실 거의 불가능하다. 그것은 개념과 언어가 갖는 일반화하고 추상화하려는 욕망에서 새나가는 비언어적인 것들이기 때문이다.
작가의 화면은 그리기의 최소화와 재현된(첨가된?) 이미지의 최소성으로 인해 감상의 조건을 만족시키지 못한다. 작가의 작품 앞에서 여전히 요구되는 것은 사유의 태도이다. 원형과 본질이 아니라 그것들 때문에 사소해지고 버려지고 결국 잊혀지는 것들에 대한 사유, 일종의 타자와 소수자에 대한 윤리적 반성의 태도이다. 물론 타자를 사유하는 일은 머리와 뇌가 아니라 슬픔과 연민을 동반하기에 반드시 가슴을 경유하는 일이다. 굳이 이 화면을 여성주의적 화면, 여성주의적 인식을 드러내는 화면이라고 부른다면 어색해질까? 지배하고 영토화하려는 남성과 달리 패배자의 자리로 물러나야 하는 것들을 기억하려는 이의 몸짓을?…”

“남겨진 얼룩이나 보잘 것 없어 보이는 물질이 모여 그림을 만들고 그것들이 의미심장한 존재가 되는 것이다… 조기주의 작업은 주어진 시공간 속에서 모종의 물질과 함께 한 우연적이고 필연적인 과정의 흔적이다. 그러니 조기주에게 흔적 만들기는 매혹적인 미술행위이자 동시에 자신의 진정한 생의 욕망과 삶의 의미를 부여하는 일이 되고 있다.”

미술평론가 박영택(경기대 교수)이 과거 ‘유의미한 흔적 남기기(2014)’라는 제목으로 작성한 전시 서문 중에서